역사이야기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세조 이야기

☆★☆★☆★. 2020. 8. 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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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일생

모두들 익히 알다시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그러나 이 훈민정음은 창제 논쟁이 좀 있었다고 한다.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는 한글창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한글을 만드는 것은 오랑캐(여진,몽고 등)나 하는 짓이라며 풍속을 바꾸는 일은 대신과 논의해야 하고 이두가 있으니 한글 표현이 가능하다고 그랬다.

 

그러나 세종 등 왕실인사는 한글 창제를 주도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다수이니 쉬운 글자를 전파하자, 글을 알면 성리학 전수에 용이하다, 한글은 우리말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결국 정치세력이 문자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행위를 방지할 수 있었다. 세종대왕님이 만든 훈민정음 덕분에!

어찌 됐건 백성들은 훈민정음 덕분에 좀 더 나아진 나라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세종은 1450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1455년~1468년), 그는 누구인가요?

세종이 죽고 나서 문종이 즉위했고, 그다음 단종이 즉위했다. 그러고 나서 세조가 즉위했다. 세조는 조선 초기 왕권강화에 힘쓴 제7대 임금이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쫓아낸 뒤 임금이 되었다. 토지제도와 군사제도를 개혁해서 나라의 재정과 국방을 튼튼히 하고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많은 업적도 쌓았다.

세조는 1417년에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자 시절에는 수양대군이라고 불렸으며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다. 그리고 그의 친형이 문종이다.

 

문종도 세종처럼 잔병치레가 많았던터라 임금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불과 39세였다. 그런데 문종이 죽자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임금이 되었다. 왜 세조가 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세조가 장남이 아니라서였다.

단종은 문종의 아들이었고, 당연히 문종이 죽고 나서 단종이 6대 임금으로 되었다.

단종이 12살이다 보니 의정부가 나랏일을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대신들의 입김이 세졌다.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했었던 조선시대 문신 김종서 같은 사람들? 김종서는 고려사 편찬과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할 만큼 학문적 식견이 아주 뛰어난 문관이었다. 애초에 김종서가 장군으로 발탁된 건 군인으로서 능력보다 행정능력과 대담한 성품이 원인이었다. 어찌 됐건.. 이걸 못마땅하게 여긴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수양대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수양대군은 수장 격인 김종서의 집에 습격하였고 둔기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서 죽여버렸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안평대군도 죽여버렸다. 이 계유정난의 설계자는 한명회였다.

계유정난에서 김종서가 죽었고 안평대군도 죽자,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던 단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살해당했다는 기록, 사악 받았다는 기록 등등 여러 가지가 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수양대군)가 즉위했다.

 

세조는 흔히 우리들은 세조를 수양대군으로 알고 있다 성은 이 이름은 유 조선 7대 국왕이다.

아버지는 세종대왕 이도이고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 씨다.

부인은 정희왕후 윤 씨이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의경세자는 군호는 도원 군 훗날 조선 9대 국왕 성종의 아버지이자 폭군 연산군의 할아버지뻘이다.

차남은 조선 8대 왕 예종이고 군호는 해양 대군이다.

딸은 세종대왕 시절 있었던 학사 정인지의 사위가 된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야심이 커서 세종 임종 직전 김종서 장군에게 명령을 해서 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세종의 장남이자 형인 문종의 자리를 위협하기도 했다.

형인 문종승 하후 조카 단종 즉위 때 단종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세종의 후궁 혜빈 장 씨와 내관인 엄자치 김종서와 안평대군(세종의 3남)이 위협을 해왔다.

이에 측근인 권람과 한명회가 세조를 설득해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죽인 사건(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종친은 조정에 출사를 할 수 없는데도 세조는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단종을 보필하다가 결국 조카의 보위를 찬탈해서 조선 7대 국왕에 오른다. 그 후 상왕으로 쫓겨난 단종을 노산군으로 폐위시켜 죽인다,

업적은 조선의 법인 경국대전 편찬(훗날 9대 왕 성종이 완료)을 시작했고 이 시점부터 개국공신 훈구파와 새로운 세력인 사림파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사육신 사건(1456년)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다시 임금으로 받들려다 목숨을 잃은 6명의 충신들을 뜻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이다.

계유정난을 했던 세조의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판단한 사육신들은 1456년에 명의 사신을 위한 잔치에서 세조와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사실을 안 세조는 격분하며 그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이후 사육신 집안의 모든 남자는 살해되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서 사육신과 생육신이라는 가사가 있는 데.. 생육신은 무엇이냐? 하면.. 사육신처럼 죽임을 당하진 않았지만 벼슬을 버리며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사람들을 생육신이라고 불렀다.

 

유교가 아닌 불교를 키우다

 

어쨌든 세조가 7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세조가 즉위한 후 그는 조선을 새롭게 바꾸려고 했다. 유교사상이 가득 찼던 조선을 불교사상으로 만들려는 것!

원각사라는 절도 건립하였고 대대적으로 불경도 간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하던 기관이었던 간경도감도 설치하였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사람이었기에 적들이 많았던 왕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권강화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집현전을 폐지하고 신하가 왕을 가르치는 경연도 폐지하고 의정부 서사제에서 6조 직계제로 바꾸었다.

1453년 계유정난 이후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수양대군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던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징옥의 난.. 아무래도 쿠데타로 진압하여 얻은 왕권이다 보니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세조가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건 이해가 된다.

그는 조선시대 유민을 방지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였던 5가 작통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유민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조세 대상자와 군역 대상자가 줄어들어서 재정, 국방상 문제가 발생하였는 데 이러한 유민 방지를 위해 오가작통법을 실시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왕권강화였던 듯.. 5위 체제도 정비했고 조선 전기 지방 방위체제였던 진관 체제도 실시했다.

1466년에는 직전법을 실시하여 현직 관리만 수조 권(토지)을 지급했다. 현재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것과 같은 제도인 것.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대왕님의 업적은 정말 많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종대왕 업적만 정리해볼게요!

우리의 고유 언어인 한글을 만들었죠.

백성들의 문맹을 퇴치하여 우리나라 문맹률을 낮추셨습니다.

문자의 기원과 탄생비화 등이 가장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답니다.

짧은 시간만에 문자를 새로이 창제하신 건 정말

역사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세종대왕님의 업적이죠.

국방 문제에서도 세종대왕님의 업적이 있습니다.

북방 국경선인 4군 6진을 개척하여 우리나라의 국토도 넓히셨어요.

노비들도 실정에 맞게 고용하는 포용청책을 썼습니다.

조선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셨던 임금님이었고,

인재 등용 책으로 대표적 노비인 우리나라 최고의 발명가인 장영실을 기용했죠.

이는 현재 과학기술 국가 연구 중책에 강아지를 채용하겠다고

발표하는 수준으로 당대의 사회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입니다.

그 덕에 조선은 측우기, 앙부일구, 자격루 등을 만들게 하여 과학의 발전도를

크게 높일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문화적인 발전도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한글로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팔도지리지, 석보상절, 치평요람 등이 있죠.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행실도’도 만들었어요.

역사책 ‘고려사’도 정리했습니다.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뛰어난 역사기록서 입니다.

세종대왕님은 음악부문에도 발전 기여를 하셨습니다.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했습니다.

자, 아직 끝이 아닙니다.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화포의 주조기술, 화약제조 기술까지 발전을 기울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의 큰 그림이 수 백 년 뒤 이순신 장군님의

위대한 승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님 만세

조선 이후 우리 대한민국의 국가적 원수이자

한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가장 혐오하는 나라 베스트에 꼽히는 왜구

일본 왜구를 정벌하기 위해 1418년에는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간단하게 적어도 이렇습니다.

세종대왕 그분께서는 대왕이라 불림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2020/08/19 - [아시아 역사이야기] - 훈구파와 사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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