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정중부의 난(무신정변) 이야기

☆★☆★☆★. 2020. 8. 1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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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이란 고려 의종 24년, 1170년 8월에 고려의 무신들이 보현원에서 들고일어난 정변을 말한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무신정권시기라고 부른다.

 

이들은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무신들이 왜 갑자기 보현원에서 정변을 일으켰을까. 그 이유는 당시 무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당시 고려는 문벌귀족사회였다. 문신들이 무신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려의 문반,무반은 같은 양반 관리로 단일 관리체계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되어 법적으로는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실제로는 문반만이 귀족이 되어 정치권을 독차지했고 무반은 귀족 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만 지내야 했다. 당시 무신들은 전시과 체제의 문란으로 군인 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생활고에 곡소리를 냈던 무신들이 굶어 죽어나갔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무신들은 어두운 현실 속에서 속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1170년 8월이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의종이 보현원 행차 도중 오문에서 갑자기 멈추더니..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고구려의 전통무예였던 수박희를 열자고 했다. 수박희는 두 사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서 손으로 힘과 기술을 겨루는 놀이이다. 씨름과 택견이 혼합된 형태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대장군이었던 이소응이 수박희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빠져나왔는 데.. 이때 지나가던 문신이었던 한뢰가 이소응을 조롱하며 뺨을 세게 때렸다고 한다.

 

대장군씩이나 되는 양반이

새파랗게 젊은 것들도 감당하지 못하냐?

어휴 등신 ㅉㅉ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의종과 문신들은 크게 웃었으며 다른 문신들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그러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정중부는 그 자리에서 대로를 하며 한뢰에게 대항하였다고 한다.

 

이소응은 3품 벼슬을 지내고 있는 사람인데

너 따위가 어찌 그런 험한 말을 하느냐?

당장 사과하지 못해?

 

대장군은 무신이 올라갈 수 있는 두번째로 높은 3품 벼슬이었다. 한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사회가 무신을 얼마나 깔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이 사건을 계기로 화가 단단히 난 무신들은 보현원에서 정중부를 중심으로 문신들을 대거 살해했다.

당시 임금이었던 의종도 폐위시켰다. 그리고 경종을 즉위시켰다.

얼마나 문신들에 대한 분노가 심했는 지.. 그들의 집까지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정중부의 집권(1170년~1179년), 김보당의 난(1173년)

정중부는 무신정권의 시작을 했던 인물이었다. 약 9년간 집권을 했다. 무신이 집권을 하는 건 최초였다.

그러나 정중부가 집권을 한 뒤로 3년 후.. 동북면 병마사 직책을 역임하고 있던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복위시키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의종을 극도로 싫어했던 정중부를 이길 순 없었다. 김보당의 난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김보당은 원래 문벌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무신정권에 합류했다고 한다.

역시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맞는건가.. 의종을 복위하려고 운동을 펼쳤고 난을 펼쳤다.

김보당의 난으로 인해 많은 문신들이 묻지마 살해당했다. 언제 또 의종 복위 운동할지 모른다는 사유로. 김보당 같은 사람이 또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위총의 난(1174년 9월~1176년)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지가 엊그제 같은데.. 곧바로 1년 후에 조위 총이라는 사람이 약 3년 동안 난을 일으켰다.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 9월, 정중부와 이의방의 무차별적인 문신 살해에 불만을 가졌으며 평양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개경의 중방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

 

이렇게 격문을 돌렸던 조위총은 민심을 선동했고, 당시 무신정권에 지친 농민들이 조위총의 편이 되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윤임첨과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들의 활약으로 조위총은 목이 베이게 되고.. 서경의 통양문과 대동문이 공격당해서 서경이 함락되었다. 그렇게.. 조위총의 난도 실패로 끝났다.

 

망이, 망소이의 난(1176년)

조위총의 난이 끝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난이 일어난다. 바로 망이, 망소이의 난..

공주 명학소의 백성 망이와 망소이가 무리를 이끌고 일으킨 반란이다. 그들이 거주하던 공주 명학소는 농경 대신 특산물 제작과 공납에 특화된 곳이었다. 이 곳에서는 지역 특성에 따라 금, 은, 명주, 기와, 도자기, 차, 숯, 철 등을 생산했는 데..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솔직히 천민 취급을 받았다. 당시 고려의 일반 행정구역이었던 주, 군, 현과는 다른 특수 행정구역으로 다들 꺼리는 곳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 살던 망이, 망소이는 왜 난을 일으켰을까.

 

백성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

점점 힘들어지던 서민들의 삶

 

당시 무신정권으로 어지러웠던 사회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궁핍했는 지.. 특히 '소'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교종 승려의 난... 계속해서 농민전쟁과 난이 일어나는 실정에서 백성들은 얼마나 경제가 어렵고 힘들었는지.. 얼마나 힘들었으면 망이 망소이가 궁핍했던 삶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난을 일으켰는지 이해가 되다가도 마음이 아프다.

 

1176년, 공주 명학소민이었던 망이와 망소이가 무리를 이끌고 공주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제발 백성들의 삶도 지켜봐 달라며 고함을 쳤다.

생각보다 망이와 망소이의 난이 무서웠고 진압하기 힘들어지자 정중부 측에서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격상시켜서 지방관을 파견해 좀 더 나은 백성의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향소부곡이 최초로 일반현으로 승격된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