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조선 4대사화 이야기

☆★☆★☆★. 2020. 8. 1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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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사화는 무엇인가요?

앞서 이야기 했던 성종대 정치사에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생겼고 서로 대립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4대 사화가 나타났는데.. 오늘 알아볼 주제는 바로 조선의 4대 사화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이렇게 4가지 이다. 

 

무오사화(1498년)

1498년 김일손 등 사림파가 유자광 등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성종은 세조 때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앙정계로 진출시켰는 데 이에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는 사림파와 대립했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이 춘추관의 사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세조의 왕권찬탈 비판기록)을 사초에 적었다. 사실 이건 김일손의 사초에서 "세조아들의 후궁을 겁탈했다"는 근거없는 내용이 발견되어 선왕을 능멸하는걸로 파악해서 역모혐의로 비화된 사건이었다. 단순히 훈구가 사림을 견제하기 위해 조의제문을 구실로 숙청한게 아니라 선왕에 대한 지대한 능멸, 능상행위에 대한 단죄를 가깝게 벌어진 것이고 연산군이 사화를 주도했다. 연산군이 죽인거니까. 유자광 등 훈구파는 사림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를 연산군에게 알렸고, 이에 따라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또 죽이는 부관참시를 하고 김일손을 능지처사해서 사형시켰다. 이를 1498년 무오년에 일어나서 무오사화라고 한다.

 

갑자사화(1504년)

사림파는 무오사화에 이어 6년뒤에 또 큰 화를 입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연산군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윤씨를 쫓아내는 데 찬성한 신하들을 모조리 죽인 갑자사화였다.

연산군에게 잘보여서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훈구파는 연산군에게 폐비윤씨사건을 말해버렸다. 성종은 연산군이 폐비사건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왜냐면 연산군에게 안좋은 영향을 줄까봐..

 

결국 폐비윤씨 사건을 알게된 연산군은 생전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윤필상, 김광필, 정여창 등 100여명의 사람들을 죽여버렸다.

그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 데 이걸 가만히 보고만 있던 할머니였던 인수대비가 참 못마땅했고 결국 인수대비에게 찾아가서 난동을 부리며 화를 냈다고 한다. 늙었던 인수대비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삼아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무오사화는 훈구파랑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명분으로 사림파의 힘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했던 사건이었다면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일방적인 신하들 공격이었다.

연산군은 참 폭정이었다. 멀쩡한 집을 허물고 연못을 만들기도 하며 성균관, 사간원 등 주요 청요직 기구를 폐지하고 아주그냥 자기 멋대로 행동했다고 한다. 유흥, 방탕, 사치한 행실로 흥청망청 살았고 왕권강화를 위해 성종의 정치를 '능상'으로 규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연산군이 왜 '군'으로 기록이 되는 지 알만하다. 얼마나 폭정이 심했으면..

 

기묘사화(1519년)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견디지 못했던 신하들은 서로 뜻을 모아 연산군을 쫓아내고 새로 왕을 세웠는 데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으로 구성된 반정공신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든 정치를 성종대로 환원하는 개혁으로, 경연과 성균관 등을 복구했다.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이끌어갈 인재를 찾아서 조광조를 발탁했다. 조광조는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제자였는 데 유교주의자였고 사림파였고 성리학자였다고 한다. 근데 그의 개혁정치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반정을 하는 데 기여했던 공신의 수를 줄이자는 거였고, 그것은 위훈삭제사건이었다.

 

조광조는 공신의 3/4에 달하는 사람들을 정리해버렸다. 무로 76명이나... 이에 훈구파들은 화가 났고 조광조를 몰아내기 위해 거짓소문을 퍼트렸다. 중종도 예전만큼 조광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걸 눈치챈 그들은 조광조가 왕이 되려한다는 '주초위왕' 거짓소문을 퍼트렸다. '주초위왕' 사건으로 조정에서는 훈구파 신하들을 중심으로 조광조를 벌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결국 중종은 조광조를 관직에서 물러나게했다. 이것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그리고.. 조광조는 죽었다. 조광조는 위훈삭제사건 이외에도 많은 개혁정치를 했다. 도학정치, 사림등용목적으로 현량과를 실시했고 소학, 주자가례를 중시했고 소격서, 승과를 폐지했고 향약시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양한 서적도 간행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렇게 개혁정치를 했던 그는 죽었다.

 

을사사화(1545년)

기묘사화에서 큰 타격을 받은 사림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중종말년 때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인종이었다. 그런데 인종은 왕이 된지 1년도 못돼서 죽었다. 명종이 새로 즉위했다. 그러자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인종의 외척과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명종의 외척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다.

이를 윤임(대윤,인종의 외삼촌) VS 윤원형(소윤,명종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4차례의 사화로 사림의 세력이 악화되었다.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그 어린 아들은 명종이다. 문정왕후는 12세의 어린 왕, 명종을 대신해 약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이란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여성 어른이 왕 뒤에 발을 쳐놓고 정치를 돕던 것을 말한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참 똑똑해서 신하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했지만 말이다.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의 소윤과 인종의 세력이었던 대윤이 다시 갈등을 일으켜서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결국 사림파들은 4차례나 걸친 사화로 처참히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또 문제가 일어났다. 바로 황해도 지역에서 지역차별문제를 둘러싸고 도적 임꺽정이 난을 일으킨거다. 경기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