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나제동맹 이야기

☆★☆★☆★. 2020. 8. 1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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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제동맹은 무엇일까요?

 

나제 동맹이란 삼국시대 서기 433년부터 서기 554년까지 121년 동안 지속된 신라와 백제의 군사동맹으로, 고구려를 무찌르자는 의미로 함께 결합한 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장수왕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고구려를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5~6세기 때에는 고구려가 워낙에 막강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신라와 백제는 둘이라도 빨리 동맹 맺어서 고구려를 좀 잠재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나제 동맹은 427년, 평양 천도로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대항하기 위해 433년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백제의 비유왕이 서로 체결한 게 시초이다. 신라의 '라', 백제의 '제'를 합쳐서 부르는 동맹 이름이며, 두음법칙에 의해 '나제 동맹'으로 불린다.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맞붙는 554년까지 120년정도 지속된 관계였다고 보면 된다.

455년 10월, 백제에 정변이 일어나서 비유왕이 살해당했는 데 엉겹결에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개로왕은 왕권을 제대로 행세하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에 성격이 소심했다나..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가 지속되자 이틈을 노려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신라의 눌지왕은 백제에 처음으로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고 백제를 구원했다.

 

우린 나제동맹 결의했잖아. 우린 나제 동맹이니까.

 

신라의 지원군 덕분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백제의 수도를 웅진으로 무사히 천도할 수 있었으며 나라를 이어갈 수 있었다.

문주왕이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계기는.. 당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사정없이 공격해대서 수도 위례성이 함락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493년, 백제의 동성왕과 신라의 소지왕은 혼인 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동성왕은 백제 무령왕과 배 다른 형제이다. 소지왕은 468년 하슬라(강릉) 성 이후 수많은 성으로 고구려 침략을 대비하였고 백제와 적극적인 동맹을 수립하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이 시점은 신라가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속국을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시점이 된 것이다.

481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백제가 군사를 신라에게 파견하여 고구려군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나제 동맹은 참 끈끈했으며 고구려는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다.

 

거 참.. 나제 동맹.. 언제까지 가나 보자.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백제의 무령왕, 신라의 법흥왕 같은 지혜로운 왕들이 나오면서 두 나라의 국력이나 재정 같은 게 회복되고 성장하면서 고구려 따위는 혼자서도 무찌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나제 동맹은 점점 흐트러지게 되었고 느슨해졌다. 지원군 파견도 끊기고 국경선에 방어시설을 늘리거나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가야를 두고 신라, 백제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신라와 백제는 싸움이 나더라도 서로 우리는 나제 동맹을 맺은 나라잖아!라고 위안하며 싸움을 자제하고 고구려를 상대로 함께 맞서 싸우는 국가로 지속되었다.

나제 동맹은 6세기, 동맹군이 고구려를 무찌르고 북벌에 성공할때까지 지속되었다.

551년,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북진을 시작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였다.

처음에 한강 하류는 백제가, 한강 상류는 신라가 나눠가졌는 데 신라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강하류는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진흥왕이 120년간 이어져오던 나제 동맹을 배신하고 한강 하류를 급습했다. 진흥왕은 이 지역에 신주(한강유역에 설치되었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 명칭)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을 지방관으로 임명했다.

뒤통수를 맞아서 화가 단단히 난 성왕이 대가야와 왜를 끌어들여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554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남녀 3만 9천여 명과 말 8천여필을 빼앗았는 데 이에 분노한 신라는 백제와 전면전에 나서기로 했고 그나마 형식적으로 남았던 나제 동맹은 그야말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되었다.

결국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전투를 하게 되었는 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관산성 전투이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한강유역은 완전히 신라의 것이 되었고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로 신라를 몇 차례 공격하다가 7세기 중반 들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여제 동맹을 맺어서 신라를 공동으로 압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군을 맺어서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압박하였고 삼국통일전쟁에서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이후.. 한반도에서 나제 동맹과 같은 강력하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동맹관계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추가)

우리는 흔히 진흥왕이 배신을 했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모호하다. 한국사 책에서는 진흥왕이 배신을 한 것처럼 쓰여있는데 사실 이 부분은 역사학계에서도 모호한 부분이다. 일본서기에는 전반적으로 백제 계통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신라를 실드 쳐 줄이 유가 전혀 없는데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한성을 먼저 버렸고 신라는 그것을 얻었다고 적혀있다. 그다음에 백제는 결혼 동맹으로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관산성 전쟁을 동시에 준비하였으니.. 오히려 백제가 나제 동맹을 어긴 것도 아니냐? 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시기 기록이 상황진행이 잘 쓰여있지 않아서 누구 잘못인지 누구 책략이었는지 따지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다. 기록된 것이 분명 있을듯한데 전해지지 않는 것이 좀 안타깝다. 신라의 잘못만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