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제태후 조희 이야기

☆★☆★☆★. 2020. 8. 12. 17:40
반응형

오늘은 진 시황제의 어머니인 조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로 진 시황제의 생모이자 최초의 황태후였던 조희는 황제의 어머니라는 배경 이외에도 당대에 유명했던 인물이에요.

 

중국 최초의 황제 진 시황제는 진나라의 31대 국왕으로 40세에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의 칭호를 첫 번째로 사용한 인물인데 진시황제가 이름인 줄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실제로는 중국을 통일한 거대 제국 진나라의 시황제라는 일종의 칭호인데 마치 이름처럼 불리기도 하는 유명한 인물이죠.

조나라 최고의 미녀 조희


진 시황제의 생모인 제태후(帝太后)는 본래 조나라(趙) 사람이에요. (※ 제태 후는 후대에 흔히 "조희趙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는 그녀가 조나라 출신의 여인이라 붙여진 별칭일 뿐, 성씨나 본명은 알 길이 없다고 해요.)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본래 "부유한 집안(豪家)"의 딸이었다고 전해져요. 제태후는 조나라 도읍인 한단의 여인들 중에서도 외모가 아름답고 춤을 잘 추었는데, 한단에 머물던 거상 여불위(呂不韋)가 그녀를 취하여 함께 살게 되었어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당시 여불위는 진나라 소양 왕의 손자로서 조나라 한단에 인질로 와있던 자초(子楚)를 후원하여 그를 진나라의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 왔다가 제태 후를 보게 되었죠. 제태 후에게 반해버린 자초는 여불위에게 그녀를 자신에게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고 말아요.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이미 자초를 위해 투자한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그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그렇게 하여 제태 후는 기원전 259년, 진나라 왕손 자초와의 사이에서 훗날 진 시황제가 되는 아들 정(政)을 낳게 되죠. (사기 권 6 진시황본기)

 

(※ 사기 권6 진시황 본기에서는 진 시황제가 자초의 친자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에서는 진 시황제의 친부가 사실 여불위였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에 따르면 자초가 제태 후를 얻었을 때에 그녀가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는 제태 후의 남편이 여불위에서 자초로 바뀐 데다가 훗날 그녀의 음행이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면서 생겨난 루머일 가능성도 있어 보여요. 정작 여불위 열전에서도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한 제태 후가 자초에게 주어진 후 12달 후에야 진 시황제를 낳았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임신기간이 10달 남짓한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진 시황제는 자초의 친자일 가능성이 높겠죠?)

 

기원전 257년, 진 소양 왕이 장군 왕흘(王齮)을 보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위급해진 조나라 측은 인질로 와있던 자초를 죽이려 하였어요. 이에 여불위가 자초를 감시하던 군사들에게 금 600근을 뇌물로 주어 그를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제태후와 아들 정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해요. 조나라에서 이들을 죽이려 했으나, 제태후는 부유했던 집안의 도움으로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어요. (사기 권85 여불위열전)

 

진나라의 왕후가 된 조희


기원전 251년, 진 소양왕이 죽자 자초의 아버지인 태자 안국군이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진 효문 왕이예요. 그동안 여불위의 정치공작으로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의 총애를 얻은 자초는 효문왕의 태자가 되었고, 그에 따라 조나라에서도 제태후와 정을 진나라로 돌려보냈어요. (사기 권85 여불위열전)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250년, 진 효문왕이 죽자 태자 자초가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진 장양 왕이예요. (사기 권5 진본기) 장양왕의 부인이었던 제태후는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나라의 왕후가 되었죠. 그동안 자초를 진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인까지 바쳤던 여불위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위가 승상에 이르렀고 문신후의 작위 및 낙양 10만여 호의 식읍을 하사받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시작했어요. (사기 권85 여불위열전) 

 

진나라의 태후 조희


기원전 247년, 진 장양왕이 죽자 태자 정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훗날의 진 시황제예요. 당시 진 시황제는 고작 13세의 소년이었으므로, 실권은 생모인 제태후 및 여불위와 같은 대신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고 보여요.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실제로 진 시황제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여불위의 벼슬을 높여 상방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를 아버지처럼 모시며 "중보(仲父)"라 호칭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으니까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제태 후는 과거의 남편이었던 여불위와 간통하기 시작했어요. 이 은밀한 관계는 진 시황제가 청년기에 접어들도록 계속되었고 여불위는 행여나 이 일이 들통나서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다가 한 가지 계략을 꾸미게 돼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환관 노애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조희는 남자를 지나치게 밝혔다고 해요. 여불위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감당하기 힘들었던 여불위는 대리인을 세우기로 결심한 듯해요.

 

여불위는 거대한 음경의 소유자였던 노애(嫪毐)라는 사람을 구하여 자신의 사인으로 삼았어요. 여불위는 그로 하여금 음경으로 오동나무 바퀴를 들어 올리는 공연을 벌이도록 하며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이 제태 후의 귀에까지 들어가도록 계획을 꾸몄어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제태 후가 그 소문을 듣고 노애를 얻고 싶어 하자, 여불위는 노애에게 거짓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 부형(腐刑), 즉 거세의 형벌을 받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여불위는 제태 후에게 노애가 거세형을 받은 것처럼 꾸며내서 궁중으로 빼돌리도록 권하였어요. 환관의 자격으로 조희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계획했던 거죠.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제태 후는 여불위의 말에 따라 형을 집행하는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노애를 무사히 빼낸 후 수염과 눈썹을 밀어버려 환자(宦者)로 위장시켜 자신을 모시도록 하였어요. 제태후는 이후 여불위 대신 노애와 간통하며 그를 총애하게 되었어요. 제태후는 결국 노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 점괘를 핑계 삼아 옹(雍)으로 거처를 옮겼고 노애 또한 태후를 따라가 많은 상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기원전 239년, 진 시황제가 노애에게 장신 후의 작위를 하사하면서 그의 권세는 절정에 달했어요. 시황제는 노애에게 산양(山陽)의 땅을 주어 그곳에 거처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궁실, 거마, 의복, 원유, 치렵 등을 모두 노애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노애가 결정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아요. 여기에 더하여 하서의 태원(太原) 또한 노애의 봉국으로 주어졌어요.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노애의 집에는 노복이 수천 명에 이르렀고, 벼슬을 얻기 위해 노애의 식객이 된 자들 또한 천 명에 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죠.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당시 노애가 누리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 한 가지가 있어요. 비슷한 시기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상황이 위급하게 되자, 어떤 사람이 위나라 왕에게 진나라의 내부 정황을 설명하며 말하기를, "진나라 안에서는 지금 법을 집행하는 자들로부터 아래로는 수레를 끄는 자들까지 '노 씨(嫪氏, 노애) 편을 들것인가, 여씨(呂氏, 여불위) 편을 들 것인가?'라 말하고 있습니다."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남아있을 정도니 대단하죠. (전국책 권 25 위책4 진공 위급)

 

뒤이어서 그 사람은 위나라 왕에게 차라리 위나라의 땅을 떼어 진나라에게 뇌물로 주고 이를 노애의 공으로 삼게 해 주어 여불위를 이기게 해 준다면, 진나라 태후가 위나라 왕을 감사히 여겨 진나라와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어요. (전국책 권 25 위책4 진공 위급) 이처럼 6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노애의 눈에 잘 띄는 것이 곧 진나라와 우호를 다지는 것이며, 제태 후를 등에 업은 그의 권세가 곧 문신 후 여불위와 맞먹는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던 것 같아요.

 

노애의 난


노애가 장신 후의 지위에 오른 후, 그 이듬해인 기원전 238년에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진 시황제가 제태 후와 노애의 간통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해 4월, 진 시황제는 어머니가 머물던 옹으로 가서 그달 기유일에 관례를 치르고 검을 차는 등 일종의 성인식을 가졌어요.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그런데 이때에 누군가가 노애가 사실 가짜 환관이며 태후와 간통하여 이미 두 명의 아이를 낳았고, 태후와 모의하여 그 아이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고 고발하였던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어요. 시황제는 곧 관리들로 하여금 심문케 하여 이 사건에는 상방 여불위까지 얽혀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죠.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어떤 기록에서는 그 전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요. 교만과 사치가 날로 더해지던 노애가 어느 날은 대신들과 더불어 노름하고 술을 마시다가 취하여 말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노애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곧 대왕의 양아버지(假父)인데 비루한 것들이 어찌 감히 나와 맞먹으려 하는가!"라고 말했다고 해요. 그때 어떤 사람이 그 말을 듣고는 진 시황제에게 일러바쳤고 발단이 되어 시황제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요. (설원 권 9 정간)

 

모든 것이 들통나자 노애는 왕과 태후의 인장을 훔쳐서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 도읍의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기년 궁을 공격하였어요. 이에 진 시황제는 창평 군과 창문 군 등으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니, 곧 노애를 크게 무찌르고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어요. 노애는 달아났으나 진 시황제는 그에게 100만 금에 달하는 현상금을 붙였어요. 결국 노애와 그 측근 20여 명은 모두 사로잡혀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해져 죽었고 그 종족 또한 몰살당했어요. 노애가 거느리던 사인들 또한 작위를 박탈 당하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이로 인해 촉으로 옮겨간 집안이 4천 가에 이르렀다고 하니 노애의 전성기는 완전히 막을 내렸죠.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그해 9월, 진 시황제는 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얻은 두 아이도 자루에 넣어 때려죽여버렸고, 태후는 옹의 부양 궁에 유폐시켰어요.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설원 권 9 정간) 시황제가 어찌나 분노했는지, 감히 태후에 대한 처사를 논하는 자는 죽여서 그 시체를 대궐 계단에 쌓아놓겠다는 엄포를 놓았으며, 이에 대하여 간언을 한 27명을 죽였을 정도였다고 하니 분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어요. (설원 권9 정간) 

 

이 사건의 근원이었던 여불위 또한 무사하지 못했어요. 진 시황제는 여불위도 죽이려 하였으나 그에게는 선왕을 옹립한 공로가 있었고, 또한 그가 거느린 빈객과 변사들이 많아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해요. (※그러나 여불위는 결국 이듬해 10월에 파면당한 후 봉국인 하남으로 쫓겨났고, 다시 2년 후에 자살했어요. 비록 시황제 그 자신은 믿었던 이들에 대한 배반감으로 고통받았던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여불위와 노애, 그리고 어머니인 태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만한 주변의 권력자들을 일거에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해요. 시황제가 여불위의 자결을 강요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없어서 추측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조희의 말년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 제나라 사람인 모초(茅焦)는 진 시황제에게 천하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유폐해선 안된다고 설득하였어요. 태후에 대하여 논하는 자는 모두 죽여버렸던 시황제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는 입에 거품을 물고 검을 뽑아 들 정도로 분노했다고 해요. 그러나 정작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이를 옳게 여기고는 생각을 고쳐 모초를 사면하여 벼슬을 내렸어요. 그리고는 직접 부양 궁으로 가서 태후를 함양으로 모셨고 이후 그녀를 감천 궁에 살게 하였어요. (※이 이야기는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에 모두 전하지만, 가장 상세한 기록은 설원 권 9 정간 편에 전한다.)

 

그 덕분에 함양으로 돌아온 제태 후는 모토를 불러 그를 위해 주연을 베풀며 대접하였어요. 그 자리에서 제태후는 모초를 향해 "잘못된 일에 맞서 곧게 하고, 실패를 고쳐 성공으로 만들어, 진나라의 사직을 안정케 하고 모자를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모두 모군의 공이다."라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져요. (설원 권 9 정간 편)

 

기원전 228년, 조나라를 정복한 점령한 진 시황제는 과거에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에 입성했어요. 그곳에서 시황제는 어머니의 집안과 척을 졌던 사람들을 잡아서 모두 갱살해버렸어요.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

 

그 해에 태후는 생을 마감하였어요. (사기 권6 진시황본기) 시황제는 죽은 어머니의 시호를 "제태후(帝太后)"라 하였고 아버지인 장양 왕과 함께 채양(茝陽)에 매장하였어요. (사기 권 85 여불위 열전)

 

기원전 210년, 최후의 순행 길에 나선 진 시황제가 회계산에 오른 후 남해에 세운 비석에서는 시황제의 결벽증적인 성관념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초로의 사내가 된 시황제는 간통을 저질러 자신의 가슴에 씻지 못할 회한을 남긴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돌 위에 새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허물을 숨기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요, 자식이 있음에도 시집가는 것은 죽은 이를 배반하는 부정한 일이다. 내외(內外)의 사이를 구분하여 음탕한 짓을 금지하니, 남녀(男女)가 깨끗하고 삼가게 되었다. 지아비가 간통하면 이를 죽여도 죄가 없으니 남자들이 의로운 길을 지켰고, 아내가 재가하면 자식들은 어미로 여기지 않으니, 모두 교화되어 청렴해졌다."
(飾省宣義, 有子而嫁, 倍死不貞. 防隔內外, 禁止淫泆, 男女絜誠. 夫爲寄豭, 殺之無罪, 男秉義程. 妻爲逃嫁, 子不得母, 咸化廉淸.)
- 사기 권 6 진시황 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