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박창화 화랑세기 이야기

☆★☆★☆★. 2020. 8. 2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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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이란 신라시대에 있었던 청소년의 민간 수양단체인데, 문벌과 학식이 있고 외모가 단정한 사람만 뽑은 조직이다. 심신의 단련과 사회의 선도를 이념으로 하였다.

 

화랑세기는 이러한 신라시대 화랑을 다룬 서적으로, 신라 중대의 진골 역사학자 김대문이 저술하였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도 신라의 왕호에서부터 각 화랑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들이 인용되어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라졌다. 통일신라 김대문이 쓴 이 책은 이미 역사적으로 '사라진' 책이다.

역사학자들도 그냥 막연히 화랑세기가 있었다는 것만 알았을 뿐, 직접적으로 보거나 그러진 못했다.

그런데.. 획기적인 일이 일어났다. 1989년에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된 것.

화랑세기의 발견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필사본이란 인쇄된 책이 아닌 손으로 작성된 책을 뜻한다.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이 책을 직접 집필한 저자를 분석하였는데.. 글쓴이는 박창화였다.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의 인물로, 필사는 일제강점기에 했지만 이 책이 공개된 것은 일제강점기보다 한참이 지난 1989년에서부터였다. 이 책이 공개된 계기는 박창화의 제자 김종진의 와이프가 언론에 공개를 한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6년 뒤, 1995년에는 그 전보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의 필사본이 공개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필사본은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 필사본은 화랑세기와 부합되지 않아서 화랑세기 자체를 그냥 창작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냥 창작물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생각보다 이 화랑세기 필사본이 굉장히 구체적인 것.

 

572년 동륜태자가 보명궁주를 몰래 만나기 위해 궁의 담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었다. -화랑세기 필사본 중

 

삼국사기에서는 동륜태자가 572년에 죽었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 데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이것을 과연 단순히 창작물로만 봐야 하는 것일까?

필사본 화랑세기는 생각보다 내용이 굉장히 탄탄했다. 하지만.. 박창화의 화랑세기는 사실 소설이었다.

 

화랑세기는 가짜다?

화랑세기가 그저 창작물로밖에 볼 수 없는 결정적 이유는 아직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이 그저 창작물로밖에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 화랑세기에는 당시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들이 많이 사용이 되었다. (모계, 풍월주, 전주 등)

모본에 상당한 수정과 가필, 삭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박창화라는 사람 자체가 다수의 창작물을 집필한 이력이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수 많은 창작물들 중에서 화랑세기만이 진짜 역사서라고 보는 것도 좀 억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드러났으며 이 책에서 등장하는 서로 다른 인물로 나오는 김용춘과 김용수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동일인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아 정확성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김해 김씨의 가계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과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진위가 의심되는 사료를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박창화 스스로가 생전에 김대문 화랑세기 필사본의 존재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짜 이 책이 통일신라 김 대분이 저술한 화랑세기를 그대로 필사한 책이었다면.. 본인이 직접 발표했을 것이다.

박창화가 쓴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저 창작물일지라도, 실제로 고려시대 김부식이 화랑세기를 참고하였던 건 사실이다.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가 있었던 것도 팩트이다. 그러나 이 책이 사라져서 문제인 것..

 

 

화랑세기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우선 박창화가 저술한 다른 책들의 성격도 진위를 판별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가 지은 것 중 '도홍기', '홍수 동기', '어울 우동기' 같은 음란 소설이 많다. 그가 쓴 수십 권이 넘는 책 중 성이 모티브가 되는 것이 많다. 그리고 박창화가 위서를 만들려 한 예가 있다. 그가 남긴 유고에 '유기 추모경'이 있다. 유기는 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사서의 이름이고 추모는 주몽의 다른 표기이다. 박창화가 썼으면서 고려 시대의 인물인 황주량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기 추모 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박창화의 다른 유고인 '추모경'은 한지에 쓰여 있고 황주량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위서를 만들려 시도한 것이다.

 

박창화의 필사본을 검토한 임창순 문화재위원장, 이기백 한림대 교수, 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 고대사 권위자들이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심지어 발견 당시 필사본을 검토한 정중환씨도 “왕족과 귀족들의 난혼과 성행위가 일본의 난혼과 흡사해 의혹이 있다”며 한걸음 물러났다.

 

신라 골품제와 화랑도를 연구하던 서강대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를 면밀히 검토한 후 ‘화랑세기 연구 서설-서사로서의 신빙성 확인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는 위작론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때 서울대 노태돈 교수(사학)가 “89년 발견된 ‘화랑세기’는 발췌본이고 원래 박창화의 필사본은 따로 있다”라고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새로운 필사본은 책 제목과 서문 등 앞쪽 일부가 훼손돼 없어졌지만 162쪽 분량으로 32쪽의 발췌본에 비해 훨씬 자세했다. 노교수는 두 달 뒤 필사본 역시 가짜라는 내용의 논문을 한국 고대사 연구회에서 발표했다.

 

그러나 1999년 이종욱 교수가 ‘화랑세기’ 완역본을 출간하면서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한문 원문에 한글 역주해를 단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 이야기’(소나무)의 발간으로 좀더 많은 연구자들이 ‘화랑세기’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1년 뒤 아예 대중역사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김영사)를 펴냄으로써 ‘화랑세기’가 진본이라는 쪽으로 대세를 몰아갔다. ‘화랑세기’ 완역본 출간 때만 해도 이종욱 교수는 서문에서 “화랑세기는 위작으로 생각되어 왔으며 실제 위작일 수 있다”라고 조심스럽게 시작했지만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서는 “성경은 원본이 없다. 화랑세기도 원본은 없다”는 말로 자신감을 드러냈다.

 

2000년대 들어 진위 논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교수가 적극적으로 가짜가 아니라는 근거를 내놓은 반면, 위작론 쪽에서는 학술적 반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화랑세기’ 필사본 연구가 확산되면서 진짜임을 뒷받침해 주는 주장들이 속속 나오고, 또 진본임을 전제로 신라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들도 출간되고 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향가 1편을 통해 진위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국문학계에서는 99년 성균관대 김학성 교수가 ‘필사본 화랑세기의 발견과 향가 연구의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노태돈 교수의 주장을 뒤집었다. 노교수는 ‘화랑세기’에 실려 있는 향가가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주장했지만 김 교수는 1942년 양주동에 와서야 향가 14수에 대한 완전 해독이 이루어진 것을 근거로 시기적으로도 박창화의 창작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최근 ‘화랑세기’ 관련 논문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 말 성균관대 이영훈 교수(경제학)가 발표한 ‘화랑세기에서 노(奴)와 비(婢)’다. 이교수는 98년 ‘한국사에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삼국시대의 노비 개념과 후대 천민이 된 노비의 개념이 다르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종욱 교수의 ‘화랑세기’ 역주해본에 등장하는 ‘노’와 ‘비’(각 10회)를 분석한 결과 사실이었음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의 노와 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종과 계집종의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군사적 신하의 관계였다.

 

우리 역사의 여왕들’(책세상)을 쓴 서강대 박물관의 조범환 학예연구원은 우리 역사에서 왜 신라시대에만 3명의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존재했는지 추적하는 과정에서 ‘화랑세기’에 빚을 졌다. 그는 “화랑세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만 보아왔던 신라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신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말한다.

 

대중역사서나 역사소설에서 ‘화랑세기’를 인용하는 경우는 훨씬 많다. 이덕일씨는 ‘오국사기’ 이전에도 이희근 씨와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어느 부분이 진짜인가 진지하게 검토해야지, 연구자의 지식 외의 것이 담겨 있다고 해서 위작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사료에 대한 폭력”이라고 했다. 한국 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문화재관리학)는 지난해 펴낸 ‘한국 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김영사)이라는 책에서 화랑도의 기원을 설명할 때 ‘화랑세기’를 인용했다. 그는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돼 있는 순국 지상주의의 무사 정신으로 충만한 화랑들과 달리 ‘화랑세기’가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위서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현재까지는 가짜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듯이 진짜임을 확인해 주는 증거도 없다.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원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론이 유보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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