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청나라와 중국의 마지막 황제 아이신 기오로 푸이

☆★☆★☆★. 2020. 7. 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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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마지막 황제이자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귀 푸이는 제국의 몰락, 중일 전쟁과 세계 2차 대전, 중국 내전, 그리고 중국 인민 공화국의 건국을 경험했던 특이한 황제였어요.

상상할 수 없는 특권층 생활 속에서 태어난 그는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겸손한 정원사로 죽었어요. 1967년 그가 폐신암으로 사망했을 때, 푸이는 문화혁명 조직원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소설보다 더 기괴한 인생 스토리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받았어요.


푸이의 어린 시절

1906년 2월 7일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아이신 기오로 푸이는 늦가을 왕족의 아이시시오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족 중 한 명인 후루와기아 가문의 유씨였어요. 우란왕자. 그의 두 집은 중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대후지황후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1908년 11월 14일 그의 삼촌 광수천황이 비소 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두 살 때 퀸 더그는 다음 날 죽기 전에 이 남자아이를 선택했어요 바로 새 황제로 말이에요.

1908년 12월 2일 서안동의 황제로 공식 등극한 부의의 아기들은 이 의식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는 폐황후에 의해 정식으로 입양되었어요.

이 소황제는 다음 4년을 자금성에서 보내면서, 그의 생부모와 관계를 끊고, 모든 유치한 변덕에 복종해야 했어요. 그 어린 소년이 힘이 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그는 난폭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를 말릴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라고 할 수 이쓴 원차오왕 뿐이였다고 해요.

 

푸이왕의 짧았던 통치

1912년 2월 12일 폐위폐위가 공식적으로 종식되면서 '황제 퇴위 제국의 칙령'이 제정되었어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합작과 참수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원석개 장군으로부터 은 천칠백 파운드를 받았다고 해요.

원정(元靖)은 1916년 신왕조 건설을 위해 자신에게 홍시안(紅西安) 황제의 칭호를 수여한 1915년 12월, 자신을 중화민국 총통이라고 선언했으나, 왕위에 오르기 3개월 전 신부전으로 별세하고 말았어요.

한편, 부의는 제국을 뒤흔든 신해혁명을 알지 못하고 자금성에 남았어요. 1917년 7월, 또 다른 장순이라는 군벌은 부의에게11일 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경쟁자 두안지루는 잠식해 복위했어요. 1924년 또 다른 장군 펑유시안(彭友西安)은 18세의 전 황제를 자금성에서 추방했어요.

 

일본과의 관계

베이징에 거주하는 푸이는 1년 반 동안 일본 대사관에서 지냈어요. 1925년 중국 해안선을 향해 옮겨 톈진의 북단 일본인 거류지로 옮겼고 푸이의 권세를 몰아낸 한족의 공동 적수였다고 해석되고 있어요.

푸이 이전의 황제는 1931년 전쟁, 일본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어요. 그러나 공교롭게도 일본인들은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명분을 내세우기 시작했어요. 1931년 11월에 일본에 의해 새로운 푸이 괴뢰 만주국 황제로 선정되어 조종을 당했어요. 

푸이는 중국 전체를 통치하고 싶어했고 나중에 결혼하여 아이를 나으면 일본에 데려가서 키우겠다는 진술서를 쓰도록 강요받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일본인의 잔악함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줄 알았는데 멀리 중국에까지도 그 영향을 끼쳤다고 하니 무섭네요. 과거 역사를 되새겨보면 어느 나라도 일본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것을 알 수 있는데 참 한결같은 민족인것 같아요.

 

1935년과 1945년 사이에, 만주를 정탐하다 푸이는 일본 정부로부터 국가를 향해 명령을 전달한 관동의 감시와 장교의 지시를 받았어요. 그의 조련사들은 원래의 직원들을 제거하고 점점 더 일본인으로 바꿨어요. 보다 완벽하게 푸이를 조정하기 위해서죠.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이 투항했을때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출국한 푸이였으나 일본은 1946년 도쿄 전범 재판에서 강제로 증언하도록 만들었고 1949년까지 소련의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지냈다고 해요.

마오쩌둥(毛澤東)의 홍군이 중국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자 소련은 43세인 전 천황을 새 공산주의 정부로 넘겼어요.

푸이의 장년기

마오쩌둥 주석이 전쟁 범죄 관리 센터로 보낼 것을 지시해 푸이는 감옥으로 보내졌어요. 일명 리아오둥3번 감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일본 전쟁 포로를 재교육하는 감옥이에요. 푸이는 앞으로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공산주의 선전을 계속 선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죠.

1959년 중국 공산당의 공개 연설을 위해 준비한 푸이는 재교육 감옥에서 풀려나 베이징 식물원에서 보조 정원사가 되었고, 1962년에 이수정이라는 이름의 간호사와 결혼을 하였어요.

 

1964년부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필을 맡아온 그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당 고위 관계자의 후원을 받은 자서전 『황제』부터 『시민』까지를 썻어요.

 

황제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만나 이리저리 팔려다니며 일본의 꼭두깍시로 살아온 푸이, 이전에 소개했던 다른 왕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죠. 평생을 인형처럼 살다가 마지막엔 정원사라니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저 높은곳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인생의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뤘으니 평범한 일상을 바랬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푸이의 마지막

1966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문화혁명에 불을 붙이자 그의 붉은 근위대는 푸이를 '옛 중국'의 궁극적 상징으로 삼았어요. 결국 부의는 보호감찰에 쳐해졌고 감옥에서 풀려난 뒤 몇 년간 누려온 단순한 자유와 일상까지도 잃어버렸어요. 이때부터 푸이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고 해요.

1967년 10월 17일 61세의 중국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신장암으로 사망했어요. 그의 기이하고 격동적인 삶은 60년 전 세 가지 정치 체제를 시작하였던 도시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어요.

 

중국의 마지막 황제라면 뭔가 엄청나고 부와 권력을 누렸을거 같았지만 오히려 반대의 비참한 삶을 살아온 푸이 황제. 과연 그의 삶은 어땟을까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 저리 끌려다니고 이용만 당하다가 끝끝내 적은 나이로 삶을 마치고 말았는데 차라리 일반 백성으로 태어낫다면 작은 행복이라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것을 알았을때 그 힘듦은 얼마나 컷을지 상상이 안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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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마지막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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