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마르코 폴로 이야기

☆★☆★☆★. 2020. 7. 1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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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는 누구인가요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 상인인 아버지와 삼촌 마페오 폴로와 니콜로 폴로 형제를 따라 몽골에서 중국까지 여행한 위대한 탐험가예요. 17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서 대륙을 넘어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동방견문록이라는 여행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어요.

 

마르코 폴로는 1296년부터 1299년까지 세인트조지 팔라조의 제노바 교도소에 수감됐어요.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그는 베니스 식당을 지휘하다 체포되었어요. 그 사이 아시아를 통해 동료 수감자와 경호원들에게 그의 여행담을 들려줬고, 그의 감옥 친구인 루스티 첼로 다 피자가 적어주었고 그 결과 동방견문록이 탄생하게 되었어요.

 

일 리 오네라고도 불린 이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가 죽기 전까지도 친구들마저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본 것만을 기록하였고 절반도 다 적지 못했다고 얘기하였어요.


두 사람은 풀려난 뒤 '마코폴로 여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유럽을 사로잡았어요.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의 멋진 외투, 검게 그을린 돌, 종이로 만든 중국돈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었어요, 마르코 폴로는 실제로 중국에 가서 그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보았는가? 하고 말이에요.

마르코 폴로의 어린시절

마르코 폴로가 1254 CE에서 태어났다는 증거는 없지만 아마 베니스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어요. 어린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는 태어나기 전 아시아로 떠났고 소년이 10대가 되었을 때 돌아왔어요. 그는 그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모른 채로 떠 낫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만약 알았다고 하면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우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에요.

폴로 형제 같은 진취적인 상인 덕분에 베니스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환상적인 오아시스 도시에서 수입의 주요 무역센터로 번성했어요. 그리고 저 멀리 있던 놀라운 중국이라는 나라와 인도를 제외한 실크로드 전체가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였어요. 칭기즈칸은 죽었지만 그러나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몽골의 위대한 땀이자 중국 원나라의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었어요.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1260개 교황의 황소를 타고 기독교 유럽에 발표했어요. 인간 아닌 타르트의 손에서 천국의 분노를 얻을 수 있는 재앙은 없었다며 지옥의 은밀한 경계에서 분출된 것처럼 지구를 압박하고 파괴했지만 볼로스 같은 사람에게는 편안하게 느껴질 뿐이었어요. 그에게는 몽고제국은 지옥이 아니라 부의 원천이라고 했으니 말이죠.

아시아로 떠난 마르코 폴로

1269년 폴로의 아버지가 베니스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니콜로의 아내가 죽었고, 마르코 폴로라는 15살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2년 후, 그 십 대 소년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삼촌은 동쪽으로 향하는 먼 여정을 떠 낫어요.

폴로스가 현재 이스라엘의 아킬레스, 낙타를 타고 페르시아의 호르무즈로 갔을 때, 처음으로 쿠빌라 칸의 법정을 방문했을 때, 카디르 칸은 폴로 형제들에게 예루살렘의 성묘에서 기름을 채취할 것을 요구했고,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직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기름을 팔러 갔어요. 그래서 폴로스는 성유를 사러 성도로 갔죠. 마르코의 여행기록에는 이라크 쿠르드족과 습지 아랍인을 비롯해 다양한 흥미로운 사람들이 언급돼 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했던 모습이 동방견문록에 그대로 남아서 전해지고 있어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억류된 어린 마르코는 정교회 기독교가 이단아로 취급되고 네 스토리아 기독교가 헷갈리는 것은 물론 무슬림 터키인들까지 더욱 경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상인의 직감으로 아름다운 터키 산지 담요에 감탄했다고 해요. 정말 뼛속까지 상인이라고 느껴지는 장면이에요. 순수한 젊은 여행자라면 신인들과 그들에 대한 믿음을 거스르지 않고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어요.

중국으로 온 마르코 폴로

샤바와, 케르만 로차이나에서, 페르시아 그들은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가려고 계획하였지만, 페르시아 가용 선박이 너무 안전하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대신에, 그들은 쌍봉낙타를 이용하여 육로로 운반하는 무역팀에 동행하기로 하였어요.

하지만 페르시아를 출발하기 전, 그들은 '독수리의 둥지'를 지나고, 암살단을 만나서 공격을 당하고 하는 둥 순탄하지 않은 여정이었다고 해요. 이러한 힘든 여정을 거치며 북부 아프가니스탄의 발크로 갔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하지만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발크는 마르코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징기스칸의 군대가 이 비타협적인 도시를 지구상에서 없애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폴로는 몽골 문화를 존중하기 시작했고, 중아 마니아에 대한 강박관념도 발전시켰어요. 마르코 폴로가 말했듯이 중앙아시아는 알렉산더 대왕의 마운트 부시 팔레스에서 유래했어요. 그리고 이들은 몽골의 두 주요 민족이에요. 아버지와 삼촌이 이미 잘하는 몽골어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볼로스는 몽골의 심장부와 쿠빌라 칸의 궁궐을 찾기 위해 파미르의 높은 산을 넘어야 했어요. 마르코는 사프란이라는 이름의 드레스와 삭발한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그 모습애 흠뻑 취해버렸어요. 아시아의 문화에 너무나 빠져버렸던 거죠.

이어 베네치아 인들은 카 시갈과 코탄의 거대한 실크로드 오아시스를 향해 중국 서부의 무시무시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들어갔어요. 40일 동안 불타는 풍경을 지나온 타클라마칸의 이름은 들어가도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고 해요. 3년 반의 힘든 여행과 모험을 거쳐, 폴로스는 마침내 중국의 몽골 법정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그는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만남을 하게 돼요.

쿠빌라이 칸과 만나다

원나라의 창시자인 케블라 칸을 만났을 때 마코 폴로는 스무 살이었어요. 그때는 이미 그는 13세기 유럽 대부분의 의견과 충돌했던 몽골인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어 있던 상황이었죠. 그의 여행은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과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유로 도시와 땅, 왕국을 정복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어요. 그만큼 그 시대에는 먹고사는 기본적인 의식주 자체가 너무 힘든 생존과 투쟁의 시기였으니까요.

폴로스는 향도나 사나두로 불리는 쿠빌라이의 여름의 수도에 도착했어요. 마르코는 그곳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홀과 방... 동물, 새들, 나무와 꽃의 문양과 이미지에 금박을 입혔는데... 분수, 흐르는 물, 강, 아주 아름다운 잔디와 숲이 있는 성처럼 요새화 되어있었다고 얘기했어요.

폴의 세 사람은 모두 쿠블라이 칸의 법정에 가서 절을 했고 칸은 그의 오랜 베니스 친구를 환영해 주었어요. 니콜로 폴로는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휘발유를 칸에게 선물했다고 해요. 아들 마르코를 종으로 삼아 몽골 영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있어요. 마르코 폴로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하인처럼 데리고 다녔다는 이야기들도 전해지는 걸로 봐서는 그다지 애틋한 부자관계는 아니였던 거 같아요.

쿠빌라이 칸을 돕다

처음 폴로의 가족들은 17년 동안 중국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요. 특히 마르코는 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쿠빌라이 칸은 그들을 떠나지 못하게 막았어요. 칸의 총애를 받아서 몽골인들의 질투심을 샀다고 하지만 사실 마르코 폴로는 친구나 손님으로 칸에게 대접받은 것은 아녔다고 해요. 광대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 상대로만 취급되었다는 소문도 있어요.

쿠블라이 칸은 가톨릭에 대해 궁금해했고, 폴로는 가끔 그가 개종할 수도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서방의 신념의 전환은 황제의 많은 과목을 무색하게 만들 수 도 있었죠. 그래서 그는 그것을 생각했지만 그 사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마르코 폴로의 위안 법정 부와 화려함, 중국의 도시 규모와 조직에 대한 묘사는 유럽 청중을 단숨에 매료시켰어요. 예를 들어 그는 중국 남부 도시 항저우를 사랑했고, 항저우에는 당시 약 150만 명의 인구가 있었어요. 당시 유럽 최대 도시 중 하나인 베네치아의 15배가량으로 커다랗다는 사실을 유럽 독자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바다로 간 마르코 폴로

1291년 쿠블라이 칸이 75세가 되었을 때, 폴로는 그들의 유럽 귀환을 허락해 줄 거라는 희망을 거의 포기하였어요. 그도 영원히 살기로 결심한 것 같다는 기록들이 남아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 마르코와 삼촌은 그해 그레이트 칸 법정을 떠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페르시아로 보내진 17세 몽골 공주를 경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조건으로 말이죠.

폴로는 바다로 돌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로 가는 배에 처음 승선해 5개월간 몬순을 향해서 항해했어요. 바람이 돌자, 그들은 스리랑카의 실론으로 갔다가 인도로 갔어요. 마르코는 힌두교 사원과 신비로운 요가에 매료되어 자니즘과 함께 곤충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어요.

아라비아반도까지 항해해 호르무즈에 도착한 이들은 공주를 기다리는 신랑에게 인도했어요. 중국에서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데 2년이 걸렸기 때문에 마르코 폴로는 그가 고향 도시로 돌아왔을 때 40세가 되었어요.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마르코는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마르코 폴로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제국 emissariry와 요령 있는 상인으로서, 폴로는 1295년 정교한 물건들을 싣고 베니스에 돌아왔어요. 그러나 베니스와 제노바는 폴로스의 무역로를 점령하는 문제를 놓고 서로 분쟁에 휘말렸어요. 그래서 마르코는 베니스의 전쟁 주방장을 지휘하고 있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됐어요.

1299년 풀려난 마르코 폴로는 베니스로 돌아와 상인으로 계속 활동했어요. 이제 그는 더 이상 여행을 가지 않았고, 그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여행을 떠나게 하였고 본인은 결혼을 하고 슬하에 세명의 딸을 낳아서 베니스에서 살았어요.

1324년 1월 69세의 나이로 마르코 폴로는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유언에서, 그는 중국에서 돌아온 후 줄곧 그를 위해 봉사하던 "타타르 노예"를 석방했어요.

비록 그 남자는 죽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어 다른 유럽인들의 상상력과 모험에 영감을 주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 사본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기록에 남겨놓았어요.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믿든 안 믿든, 유럽인들은 분명히 그의 멋진 쿠블라이 칸과 그의 자나 두와 다두의 법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이죠.

 

사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실제 중국을 방문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어요. 중국의 풍습이나 문화에 대한 언급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실제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아왔다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인데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서양 쪽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을 소개한 기록들도 많이 있어서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용들도 많이 있어서 실제의 여행 기록이다라는 이야기도 많아요.

 

워낙 오래전 이야기이고 이제는 검증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동방견문록은 서로 단절되어있던 유럽과 아시아 문명을 보다 가깝게 이어준 위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아무도 반박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로 각색되어 출판되고 있는 동방견문록이라는 이야기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역사적 유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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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

“황제들과 국왕들, 공작들과 후작들, 백작들, 기사들과 도시민,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세계 여러 지역들의 신기한 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을 가져가서 읽어달라고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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