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백제의 기원설에 대한 이야기

☆★☆★☆★. 2020. 8. 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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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중 하나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국가이죠.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해설이 존재합니다. 고구려와 부여에서 피난온 온조부족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그 반대대는 해설또한 존재합니다. 백제의 고구려, 부여 기원설에 대한 이야기들중 조금 다른 생각들을 해봤습니다.

 

한국의 역사

백제는 한국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궁금증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백제는 삼국시대의 국가로 약 650년동안 존재했던 삼국중 하나이죠.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였으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의 멸망 이후 약 300년정도를 더 이어나갔고 백제는 신라에 의해 역사에 마침표를 찍었죠.

 

한국의 역사를 간단히 시대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사시대 - 고조선시대 - 원삼국시대 -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 후삼국시대 - 통일왕조시대 - 식민지시대 - 현대

 

기원후 375년경 삼국시대 국가의 모습

백제의 기원설에 대한 근거들

백제는 고구려, 부여에서 기원한다고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고고학 논문을 읽다보면 과거 고구려 지역이었던 통화 만발발자 유적의 대형 토광묘의 21호묘와 석촌동 3호분 동쪽의 토광묘군이 대형 장방형 묘광의 굴착, 다인장(多人葬), 집단장이라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발발자 유적의 토광묘 유적을 모아산유적과 연관시켜 부여계 유적으로 볼 경우, 백제가 부여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부여의 초기문화라 할 수 있는 서단산문화의 주거지 형태가 옥저로 비정되는 두만강 유역의 단결-크로노프카 문화, 한반도 중부의 중도유형문화의 주거지 형태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흔히 여(呂)자형 집자리와 철(凸)자형 집자리로 알려진 형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백제와 고구려와의 연관성은 묘제야 고구려나 백제나 적석총 양식으로 같다는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연천 학곡리나 제원 양평리의 무기단다곽식 적석총에서 출토된 공반유물인 청동방울, 청동환, 청동팔찌 등이 고구려의 무기단식 석곽적석총에서도 똑같이 출토돼서 문화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해설도 존재합니다.

 

단결-크로우노프카의 주거지 형태 역시 외형상의 유사성일 뿐이지 그 외에는 큰 차이점이 있는데다 이에 대한 비판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연천 학곡리나 제원 양평리의 유물들도 계속 묘제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억지로 공통점을 찾으려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실제 적석총이라는 공통점 외에 묘제 자체의 연관성도 없을 뿐더러 저런 유물들은 교류를 통해서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서로 다른점에 대해서는 어떤곳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토기를 기반으로 한 근거

하지만 백제의 지배세력을 마냥 고구려계나 부여계라고 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토기입니다. 백제의 토기는 원삼국시대 말기의 타날문토기의 형태가 이어지거나 한군현의 토기의 영향을 받았을 뿐 고구려나 부여의 토기의 영향은 나타나지 않았죠.

 

그리고 부여토기나 고구려토기에 달려있는 손잡이가 한성백제토기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흑색마연토기가 고구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 고구려와는 상관없고 칠기의 질감을 흉내낸 것일 뿐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진·변한이 있던 영남지역의 삼각형점토대토기가 그 기원지에 대해서 이설은 있을지언정 북쪽에서 기원했음이 확실해서 사로6촌의 주민들은 조선의 유민출신이라는 삼국사기 기록과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삼각형 점토대토기의 발생은 최근 자체 발생설이 최근 학계의 정설이죠.

 

장신구를 기반으로 한 근거

또 다른 차이점은 장신구의 차이입니다. 백제 적석총에서는 옥 장신구랑 금제 장신구가 같이 출토되는데, 고구려지역이나 부여지역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신구만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다른 지역의 특징입니다. 귀금속의 경우는 지역에서만 발굴되는 재료로 만들어지지는 않죠. 다만 선호하는 방식이 다른것 입니다.

고분을 통한 근거

그런데 석촌동의 고분들의 조성시기는 아무리 빨라야 3세기고 만발발자는 청동기~초기철기시대라 직접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집자리의 경우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강원도나 함경도도 같이 공유하는 문화라서 부여와 백제의 연관성을 설명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포자연문화의 집자리가 서단산문화와 동일하거나 연속성이 있는지도 확실한 자료들이 없기때문에 연관성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많은 역사서에 기록되있는 장제의 연관성을 이야기 하는 것들은 잘 읽어보면 대체로 억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토광묘에 유사하고 차이가 있다는것 자체가 모순이죠. 그냥 땅 파고 무덤 넣는것일 뿐인데 작업하는 사람마다 약간씩 형태가 다를 뿐이지 시대적인 유형이 있었다고 보기는 애매하죠.

 

마치며

고구려-부여의 기원이나 고구려-백제 기원이나 이런 학설들의 문제점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회의적이지만, 그 의미를 찾으려 할 때 이미 문헌사료의 그 내용 자체를 사실로 전제하고 접근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꾸 둘 간의 공통적인 것만을 찾으려고 하지, 둘 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전혀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무슨 토기 하나, 무덤 비스무리한 거 하나 나오면 고구려와의 계통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 나머지 같은 유구 내에서 나오는 엄청난 차이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라고 하면 뭐라고 답할 지 궁금합니다.

 

이런 이주설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당시 이주 특히 먼 거리에서 오는 그런 장거리 이주가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질 수 있냐는 고민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그 정도 장거리 이주를 했을 정도면 그 일대에서 굉장히 큰 변란이 일어나서 더 이상 경제적으로 더 이상 그 일대에서 먹고 살 수 없었다는 것이겠고, 백제 지역에 와서 왕으로 군림했을 정도면 당시 어마어마한 세력들이 내려왔다는 의미겠죠.

 

그렇다면 말씀대로 도공들도 내려왔을 것이고, 식솔들도 내려왔을 것이고, 기타 어마어마한 인원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면서 살았기 때문에 토착문화와는 배타적인 하나의 고립적 문화가 발생하거나 또는 토착문화와의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뚜렷한 변용 양상이 고고학적으로 확인이 되어야 하겠죠. 예를 들면 점토대토기문화처럼 말이죠.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B0%B1%EC%A0%9C

 

백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제(百濟, 영어: Baekje, 기원전 18년(?) ~ 660년 8월 29일)는 대한민국의 고대국가 중 하나로 신라, 고구려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시조는 부여·고구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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